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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e96287 2026. 2. 3.
2차 건설기 설계 도면 1814년, 다름슈타트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게오르그 몰러의 반쪽 대성당 설계도면이 발견되어 공사가 재개되었다.[30] 이 설계는 게하르트의 후임자였던 아르놀드가 작성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반쪽 설계도는 1816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 들어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인기가 없어졌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 계획되었던 설계도는 독일의 통일로 인하여 당시 강하게 불었던 민족주의적 의미를 함축하는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재설계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1842년 9월 4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대주교 요하네스 폰 가이셀에 의해 쾰른 대성당의 건축을 재개하는 주춧돌이 다시 세워졌다.[31] 주춧돌은 완공되지 못했던 남쪽 탑 가장 위에 놓였으며 기공식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주춧돌이 놓인 이곳에서, 이 탑들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들이 우뚝 솟을 것이다.”[32]라고 연설하였다. 또한, 프로이센 왕가는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여, 기공식과 함께 왕실의 중요한 의뢰 및 건설 비용 회계를 담당할 '쾰른 중앙 성당 건설 연맹'이 결성되었다.[33] 한편, 1820년 10월 19일에는 성당에 도둑이 들어 동방 박사 유골함의 값 비싼 부분을 때어내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823년 성당 건설 조합은 재설립되어 첫 번째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34] 재개된 공사의 첫 번째 공사 총 책임자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츠비르너가 임명되었다.[35] 그는 성당의 완공을 위하여 1855년 성당 남쪽 면의 설계를 완성하였다. 1848년 일시적인 목재 천장이 신랑과 익랑에 설치되었다. 1863년에는 내부 공사가 모두 완료됨에 따라 내진과 신랑 사이에 세워져 있던 분리 벽이 560년 만에 해체되었다.[36] 1863년부터 서쪽 전면부 공사가 재개되었다. 북쪽 탑을 공사할 때에는 프로이센 왕가의 지원금만으로는 건설비가 충당되지 못했기 때문에 성당 복권을 판매하여 부족한 예산을 채웠다.[37] 드디어 1880년, 대성당은 1280년 중세시대에 착공된 지 600년 만에 완공되었다. 익랑의 현관 전면부는 중세시대 설계가 없었기에 19세기 작품이 되었다. 건설 기간에 2명의 공사 총 책임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츠비르너와 카를 에두아르드 리하르트 포이히텔을 통하여 지붕과 탑을 건설하는 데에 근대적인 기술이 도입되었다. 건축에 소비된 암석들은 총 삼십만여 톤에 달하였다. 완공된 직후 157.38미터의 쾰른 대성당은 4년 후 169.3미터의 워싱턴 기념비가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기록되었다. 성당이 완공된 1880년 10월 15일에는 빌헬름 1세가 공식 대표로 독일 제국 건국을 위한 통일 독일의 정체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참석하여 완공 축제가 거행되었다. 당시에는 성당 꼭대기가 아직 완료되지 못했으나 당시 제작된 수많은 엽서의 사진은 이를 완공된 것처럼 수정하여 발행하였다. 하루가 지난 1880년 10월 16일 역사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다. 개신교신자인 황제에 의하여 로마 가톨릭 성당인 쾰른 대성당 내부에서 개신교 신자의 예배가 집행되었고, 당시 쾰른 대주교로 재직하던 파울루스 멜커스는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38] 축제에 참여한 수많은 쾰른 시민들은 환영식을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건축할 당시 설치되었던 임시 구조물의 철거는 1881년 상반기에 시작되어 1883년에 완료되었다. 완공 당시 성당 석재의 색은 밝은 하얀색이었다.